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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연] 코로나 패닉에 빠진 우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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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0-03-09 09:33

[유재연] 코로나 패닉에 빠진 우리의 자화상

코로나 패닉에 빠진 우리의 자화상
유재연(관광일본어학전공)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금성산을 오르는 길에 한의대 옆 매화밭을 지나다 반가운 향기에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췄다. 여느 해 같으면 매화꽃 몇 송이를 따다가 싱그러운 매화차라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일었겠지만, 전염병 상황을 검색해보다 착잡한 마음으로 연구실을 나선 터라 그냥 지나쳐 와버렸다. 금영정에서 낙타봉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지나며 내려다본 나주평야에는 봄기운이 가득하다. 그러나 산에서 마주친 사람들조차도 얼굴빛이 한결같이 침통하게 굳어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자연적인 질서에 의한 계절적 감각과 현실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이 서로 엇갈릴 때 흔히 사용하던 알레고리를 정치 상황 대신 전염병으로 인해 온 나라의 얼어붙은 심리 상태를 비유하는 수사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 두 달째 접어든 전염병 상황으로 기계언어 같았던 의학용어들이 상식이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나 일상도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생활의 패턴도 바뀌고 있다. 하긴 미국의 문명비평가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의 역사와 운명을 바꾼 세 가지 요소 중의 하나로 병원균을 꼽지 않았던가? 바이러스는 균이 아니라지만 균이든 바이러스든 역사와 운명을 바꾼 것은 그것이 야기한 질병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며칠 전부터 인터넷의 주요 포털에는 ‘컨’자만 입력해도 전염병을 의미하는 ‘컨테이젼(Contagion)’이라는 단어가 맨 위로 올라온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제목인 <컨테이젼>이 검색어 상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각종 매체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견한 영화라며 다양한 기사들을 쏟아 내고 있고 영화의 다운로드 수가 치솟고 있는 모양이다.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심조차도 상품으로 이용하려는 헐리우드의 상술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질병의 확산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 인간들의 정서와 심리를 소더버그는 매우 리얼하게 묘사했다. 십 년 가까이 지난 영화를 소환하여 다투어 시청에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처럼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영상이라는 허구의 세계에 기대어 보상받으려는 욕망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는 우리가 겪고 있는 실제 상황과의 유사성을 잘 드러내고 있고, 위기상황과 마주한 인간들의 다양한 행동 패턴 또한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비록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달리하지만 작품이 주는 공감의 근원은 그 내용이 지니는 보편성이나 적실성일 터이다.

 

  소설 속의 패닉이 현실화되다
  일본의 현대 작가 가이코 다케시(開高健)는 소설 『패닉』에서 전염병이 아닌 쥐떼들의 습격과 그로 인한 패닉의 상황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독자들의 공감을 유도한다. 작가는 일본의 전시기 통제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삶에 대한 의욕으로 충만한 전후 민중들의 활력을 쥐떼들의 역동성으로 표현하려 했다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의 독자들이라면 지금의 전염병이 야기한 패닉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패닉』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보자. 
  지방관청에 근무하고 있는 말단 공무원인 주인공은 1년 전 가을, 야산에 있는 조릿대가 120년 만에 꽃이 피면서 열매를 맺는 현상을 목도하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조릿대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의 하나로 열매는 야생동물에게 천혜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에 쥐들의 대량 번식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쥐의 번식에 따른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향후 벌어질 사태의 심각성을 예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고체계를 무시하면서까지 국장에게 직접 상신한다.  
  그러나 그의 보고서는 가볍게 묵살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고체계를 무시하고 튀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조직의 상관이나 동료들로부터 질책과 야유를 받는다. 그러는 사이 그의 예상대로 온갖 종류의 쥐들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야산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한다. 쥐들이 초목들을 닥치는 대로 갉아먹고 논밭에 뿌려놓은 곡식의 씨알들조차 모조리 먹어치우면서 이는 심각한 농작물 피해로 번진다. 관청 산림과에는 주민들의 민원과 진정서가 밀려든다. 관청에서는 쥐 피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인공의 건의대로 쥐의 천적인 족제비와 뱀을 들판에 풀어 놓기도 하고, 쥐약을 대량으로 보급하거나 쥐꼬리를 모아오면 보상금을 주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보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쥐의 대량 번식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야산과 들판의 사냥이 끝난 쥐떼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제 민가를 노리기에 이르고 혼자 잠재워둔 유아를 습격하는 등 인명피해까지 발생한다. 게다가 쥐를 매개로 하는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도시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한편 쥐떼들이 야기한 패닉 상태는 정치적 현상으로 발전한다. 야당은 주인공을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관료와 지사의 부패와 태만을 비판하면서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서 패닉을 벗어나기 위한 대책은 없다. 심지어 그 와중에서도 동물업자들과 결탁하여 돈벌이의 기회로 삼으려는 관료들도 등장한다. 사태를 덮기 위해 상급자는 주인공에게 쥐 피해 종료를 선언하도록 강요하고 결국 그는 좌천된다.
  소설은 어마어마한 쥐떼들이 자신들이 야기한 인간들의 패닉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줄지어 호수에 뛰어드는 광경을 주인공이 목격하면서 소동이 종료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극적인 결말을 작가는 툰드라 지방에서 목격되는 레밍이라는 들쥐의 이동에서 목격된 기록을 근거로 삼았다고 한다.

 

  공동체를 복원하려면
  영화 <컨테이젼>처럼 기적적인 백신의 개발이나, 소설에서 쥐떼들이 죽음에 이르는 집단행동을 보인 것과 같이 어떤 형태로든 지금의 바이러스 사태는 종료될 것이다. 다만 좀처럼 해결 기미가 보일 것 같지 않은 현재의 진행 상황에서 영화감독과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영화와 소설이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에 기시감을 주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코로나 전염병이 초기에 잘 진정되는가 싶더니, ‘신천지’라는 특정 종교집단에 의해 다시 들불처럼 번지면서 온 나라는 물론 발원지인 대구지역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만 해도 인구 10만 명당 1명꼴로 확진 환자가 나오고 있는데 비해, 대구에서는 인구 6백 명당 1명꼴로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대구지역 단체장과 정치인들은 정부 탓만 하고 있고, 확산을 차단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시민의 생명을 담보로 정치적 이익만 노리고 있다. 반면에 현장에서는 의료진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렇듯 환란 속에서 온갖 인간 군상들이 본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의 부끄러웠던 자화상을 돌아봤으면 한다.

 

-참고도서: 가이코 다케시, 『가이코 다케시 단편집』, 지만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