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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협] 새 학기를 앞둔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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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0-02-10 12:00

[남궁협] 새 학기를 앞둔 단상(斷想)

새 학기를 앞둔 단상(斷想)
남궁 협(소방행정학과 교수)

 신종 바이러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유리창 저편에는 봄의 상쾌한 하늘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아직 방안에서 쩡쩡 울리고 있는 단어, 즉 페스트가 있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의 한 장면이 설레는 3월 신학기를 앞두고 신종 바이러스 광풍을 맞은 우리 대학가의 현실과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잠시 혼란은 있겠지만 모든 게 잘 정리되고 조만간 새 학기는 열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 대학의 캠퍼스도 다시 예전처럼 신입생의 설렘과 기대까지 보태져 활기로 가득 찰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우리 대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쩌면 일시적으로 발병하고 사라지는 신종 바이러스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해마다 어김없이 학생들의 면학 의욕을 앗아가고 마는 어두운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3월이 지나고 꽃피는 4월로 접어들면 그 팽팽했던 긴장감과 활기는 봄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결국 새롭게 다짐했던 각오와 포부는 1학기가 채 가기도 전에 풀잎처럼 눕고 만다. 우리 대학 중앙도서관의 열람실 풍경이 이를 잘 말해준다. 중간/기말시험 기간 1~2주일만 반짝, 12월과 1월 국가고시를 앞두고 잠시 반짝, 그리고 1년의 대부분은 절간처럼 텅 비어 있다. 재학생 수가 7천 명 가까이 되는 대학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현실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동안 대학과 교수들이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다잡고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왔던가를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희망의 끈을 붙잡고 이 악순환을 지켜봐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하지만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법. 어찌 됐든 우리는 이 학생들과 함께 교육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동책임의 당사자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 데다가 개선의 여지조차 난망하다면, 학생 탓만 할 게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해서 좀 더 근본적인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면 기존의 생각을 바꾸는 새로운 물음이 요구된다.

 

 새로운 물음
 ‘이러한 절망적 사태 인식은 과연 우리의 올바른 문제의식일까?’라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시작해보자. 이 우울한 상황이 과연 모두 학생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의 본질 혹은 목표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대학교육이 망가졌다고 보는 것인가? 우리 스스로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 언제 진지하게 소통하고 그 의미를 공유한 적이 있었던가? 혹시 우리는 교육을 이론적 관념 혹은 개인의 경험적 판단에 가둬놓고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수자인 우리는 지금 우리 학생들이 한 인간으로서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무엇 때문에 아파하며,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두고자 하는지를 그들의 시각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교육의 성과를 ‘취업’으로 등치해 놓고 교육을 난폭하게 한 방향으로만 몰아간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 그리고 교수와 학생을 모두 그러한 ‘취업’ 이데올로기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은 사회는 또 어떤가? 이렇게 새로운 시각에서 질문을 던져놓고 보면, 오히려 학생들을 원망하며 애걸복걸하던 우리 자신에게도 중대한 결함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근대 교육의 훌륭한 고전으로 꼽히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쓴 『에밀』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훈시하기 좋아하고 학자인 체하는 우리들은 (중략)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므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주입할 뿐이다.

 

 사태의 본질
 루소의 따끔한 지적을 거울삼아 이참에 교수자 입장이 아닌 학생의 입장에서 왜 그들이 학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적 탐구심이 부족한지를 추체험(감정이입)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자면 이 사태를 몰고 온 구조적 요인부터 먼저 짚어보자. 1997년 외환위기를 호되게 겪고 나서부터 한국 사회에는 모든 걸 시장경쟁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급속히 밀려왔다. 그 여파로 대학에도 ‘먹고사니즘’이라는 신종 이데올로기가 거세게 덮쳤다. 여기에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대학의 역할을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닌 기업을 위한 직업훈련소로 뒤바꾼 것이 주효했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에 속수무책인 대학들은 이른바 ‘신지식인 양성’이라는 미명 하에 학과 명칭에서부터 교과과정에 이르기까지 온통 ‘취업’에 초점을 맞춰 실용학문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렇게 20여 년 가까이 흘러온 지금, 그 결과는 어떠한가? 사회구조적인 취업시장의 불평등은 놔둔 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제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결국 들러리로 끝나고 마는 것은 그토록 난리 법석을 피웠건만 오히려 취업에 더 목매는 현실을 보면 별다른 효과가 없음이 분명하다. 그 대신에 대학의 정체성은 회복 불능일 정도로 망가졌고, 그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다운 폭넓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고작 취업에 필요한 얄팍한 기능적 지식습득에 연연하는 난쟁이가 되어갔다.
 루소가 살던 때도 프랑스 혁명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으니 얼마나 사회가 혼탁하고 모순이 극에 달했을까. 루소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사회의 타락을 부채질한 게 학문의 타락이라고 꼬집으며, 특히 “학문의 온갖 실용성을 내세우며 학문의 가치를 운운하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270여 년 전 루소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지금 우리의 대학 현실을 보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루소라면 우리를 향해 인간의 자연적 선함을 고양해야 할 교육이 도리어 인간의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개탄했을 것이다. 타락해가는 사회에 맞춰 인간을 타락시키는 교육을 루소는 “사이비 교육”이라고 불렀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20여 년 동안 우리 대학에 복무하면서 내가 관찰해온 학생들의 특징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하자면 한 마디로 이렇다. 불행히도 많은 학생들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 좋지 않은 성적 때문에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공부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루소에 따르면, 청소년기는 왕성한 힘과 잠재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할 시기다. 그런데 이 시절 기량을 맘껏 뽐내보기는커녕 도리어 자존감이 구겨진 채 억지로 대학에 들어온다는 얘기다. 강의를 하다 보면 열패감에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수업을 외면하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이런 학생들에게 아무리 달콤하게 “취업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한들 그 얘기가 귀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대학에서 뒤늦게 인성교육과 상담프로그램 등을 강화하고는 있지만 대개는 형식에 그치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이 우리 대학의 교육이 겉도는 솔직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제라도 지금껏 관성적으로 펼쳐온 교육정책들의 실효성을 전면 재검토하는 게 순서다. 그 바탕 위에서 대안을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

 

 자존감을 키우는 교육으로 대전환해야
 지금 우리 학생들에게는 자신들의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일이 가장 절실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교육에 임하는 교수들에게도 교육공학적인 테크닉보다는 학생을 대하는 ‘교육자적 태도’가 더 중요하다. 지금껏 목격해온 것처럼 이것을 간과한 어떠한 교육적 노력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이려면 무엇보다도 교수와 학생 간에 진정성 있는 인격적 소통이 중요하다. 루소의 말대로 인간은 결핍과 한계를 지닌 미완의 존재이지만 부단히 ‘완전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여기에 교육의 역할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당장 모든 면에서 부족한 우리 학생들을 탓하기 전에 교육자로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새 학기를 앞두고 묵은 때가 잔뜩 끼어있는 내 자신을 진지하게 반성해본다. “나는 교수직을 수행해오면서 나도 모르게 권위의식과 같은 잘못된 관성에 찌들어 있지는 않았는가?” “과연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대등한 인격적 존재로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는가?” 등등. 길게 말할 것 없다. 『에밀』에서 루소가 말한 것처럼 “교사가 부모의 마음으로 학생을 대하면 된다.” 지금 우리 학생들이 내 자식이라면 이렇게 교육해도 되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해답은 자명하다.

 

참고도서
① Jean-Jacque Rousseau(1762), Emile: ou de l’éducation, 김중현(역, 2003),       『에밀』, 한길사. 
② Jean-Jacque Rousseau(1750),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Lettres écrites             de La Montagne, 김중현(역, 2007),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한길사. 

 

장 오노레 프레고나르, <책 읽는 소녀>(1769)_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